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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기사는 영화 <쓰리 빌보드>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딸이 죽었다. 누군가에게 성폭행당하고 불태워졌다. 작은 시골 마을이 발칵 뒤집어질 만큼 끔찍한 사건이지만, 7개월이 지나도록 범인은 잡히지 않고 있다.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던 엄마 밀드레드(프랜시스 맥도먼드 분)는 '소란'을 일으키기로 마음먹는다.
며칠 뒤 버려지다시피 했던 세 개의 커다란 거리 광고판(Three Billboards)에 이런 문구가 새겨졌다.
"강간당하며 죽었다"(RAPED WHILE DYING)
"그런데 아직 못 잡았다고?"(AND STILL NO ARRESTS?)
"어찌된 일인가, 윌러비 서장"(HOW COME. CHIEF WILLOUGHBY?)
영화 <쓰리 빌보드>(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 2017)는 이렇게 시작한다.
영화가 던지는 첫 번째 질문, '공정한가'
작은 마을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광고판에 이름이 적힌 윌러비 서장(우디 해럴슨 분)을 비롯한 경찰은 물론, 마을 사람들도 그녀가 * 스스로 명품이 되라 * 명품을 부러워하는 인생이 되지 말고 내 삶이 명품이 되게 하라. "명품과 같은 인생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산다. 더 나은 삶을 산다. 특별한 삶을 산다." 내 이름 석 자가 최고의 브랜드, 명품이 되는 인생이 되라. 인생 자체가 귀하고 값어치 있는 명품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당당하고, 멋있고, 매력 있는 이 시대의 명품이 되어야 한다. 명품을 사기 위해서 목숨 거는 인생이 아니라 옷으로, 가방으로, 신발로 치장하는 인생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명품으로 만드는 위대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부모는 그런 자녀가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명품을 부러워하는 인생이 되지 말고 내 삶이 명품이 되게 하라. ―원 베네딕트 일으킨 '소란'이 못마땅하다. 길을 지날 때마다 죽은 동생을 떠올리게 된 그녀의 아들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다.
며칠 뒤 마을의 신부가 그녀를 찾아온다.
"당신이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아요. 우리 모두, 온 마을이 압니다. 당신이 필요한 게 있다면 우린 뭐든 할 겁니다. 항상. (중략) 그러나 당신의 광고판에 대해서만큼은 온 마을이 단호합니다."
그녀는 안다. 저 사려 깊지 못한 말이 거짓이라는 걸. 그녀가 겪은 지난 7개월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녀는 벌써 교회에 나가지 않은 지 오래다.
"내 부엌에서 꺼져요."
그녀가 내쫓지 않았다면 신부는 이렇게 덧붙였을지 모른다. '광고판이 동네의 평판을 망치고 있다'고. 한국에선 보통 이렇게들 말한다. '너 때문에 이번 사업을 망쳤다'거나 '바라던 걸 안 들어준다고 분풀이하는 거냐'고. 다들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난 그 광고판이 공정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윌러비 서장은 억울하다. 게다가 그는 암에 걸려 곧 죽을 처지다. 그러나 그녀는 뜻을 굽힐 생각이 없다. 피해자들을 대하는 경찰과 이 사회의 태도가 공정하지 않다 믿기 때문이다.
영화는 묻는다. '우리는 과연 공정함을 따져 물을 수 있는가'.
영화가 던지는 두 번째 질문, '정의로운가'
윌러비 서장을 따르는 경찰 딕슨(샘 록웰 분)은 자신만의 정의에 갇혀있다. 그래서 그는 흑인들에겐 폭력도 서슴지 않는다.
윌러비 서장이 죽자, 그는 광고판을 빌려준 중개업자를 두들겨 팬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일로 보이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가 않다. 지금 우리 사회엔 딕슨들이 차고 넘친다.
어렵게 용기를 낸 피해자들에게 우루루 몰려가 본때를 보여주려는 이들이 그렇다. 그들도 딕슨 못지않다. 얼굴도 이름도 감춘 채로 몰려다니면서 '꽃뱀'이라 낙인찍고 '음모론'을 퍼뜨린다. 얼굴을 드러내라 윽박지르기 일쑤지만 정작 책임지는 법은 없다.
영화가 끝날 무렵 딕슨은 몰라지게 달라져있다. 하지만 자신이 믿는 정의를 향해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드는 것만큼은 그대로다. 딕슨의 정의는 여전히 누군가에겐 폭력일 뿐이다.
여기서 영화는 다시 묻는다. '우리가 좇는 정의는 다른 이에게도 정의로운가'.
영화가 던지는 마지막 질문, '올바른가'
윌러비 서장은 죽음을 앞두고 밀드레드에게 편지를 남긴다. 그는 먼저 범인을 잡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범인을 잡지 못해 자신도 괴로웠다며, 억울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광고를 내건 건 아주 좋은 생각이었다고 인정했고, 범인이 꼭 잡히길 바란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윌러비 서장은 아무도 모르게 한 달치 광고비를 내주기도 했다. 그는 억울했고, 죽음을 앞두고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피해자의 입장에 서려 애썼다. 좋은 경찰이 돼주진 못했지만 적어도 좋은 이웃이자 좋은 시민으로 남은 것이다.
영화는 마지막으로 묻는다. '한 사람의 동료이자 시민으로서 우리의 태도는 올바른가'.
8년 만에 입을 연 어느 검사의 외침을 시작으로 우리 사회 곳곳엔 크고 작은 '쓰리 빌보드'들이 세워지고 있다. 아마 이 '소란'은 앞으로도 한참은 더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 누군가의 마지막 외침이 터져 나올 때까지 이 '소란'이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 사회가, 우리들 모두에게 더 나은 곳이 될 수만 있다면 이깟 '소란'쯤 아무 것도 아니다.
정말 두려운 건 그 숱한 외침에도 우리들 삶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게 아닐까. 오늘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게 있다면 그것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달라지지 않으면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 나면 아마도 당신 곁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세워져 있을 '쓰리 빌보드'가 조금은 달리 보일 것이다. 그러니 너무 늦지 않게 이 영화를 보길 바란다.
딸이 죽었다. 누군가에게 성폭행당하고 불태워졌다. 작은 시골 마을이 발칵 뒤집어질 만큼 끔찍한 사건이지만, 7개월이 지나도록 범인은 잡히지 않고 있다.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던 엄마 밀드레드(프랜시스 맥도먼드 분)는 '소란'을 일으키기로 마음먹는다.
며칠 뒤 버려지다시피 했던 세 개의 커다란 거리 광고판(Three Billboards)에 이런 문구가 새겨졌다.
"강간당하며 죽었다"(RAPED WHILE DYING)
"그런데 아직 못 잡았다고?"(AND STILL NO ARRESTS?)
"어찌된 일인가, 윌러비 서장"(HOW COME. CHIEF WILLOUGHBY?)
영화 <쓰리 빌보드>(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 2017)는 이렇게 시작한다.
영화가 던지는 첫 번째 질문, '공정한가'
▲ 영화에 등장하는 거리 광고판 |
ⓒ 쓰리 빌보드 |
작은 마을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광고판에 이름이 적힌 윌러비 서장(우디 해럴슨 분)을 비롯한 경찰은 물론, 마을 사람들도 그녀가 * 스스로 명품이 되라 * 명품을 부러워하는 인생이 되지 말고 내 삶이 명품이 되게 하라. "명품과 같은 인생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산다. 더 나은 삶을 산다. 특별한 삶을 산다." 내 이름 석 자가 최고의 브랜드, 명품이 되는 인생이 되라. 인생 자체가 귀하고 값어치 있는 명품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당당하고, 멋있고, 매력 있는 이 시대의 명품이 되어야 한다. 명품을 사기 위해서 목숨 거는 인생이 아니라 옷으로, 가방으로, 신발로 치장하는 인생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명품으로 만드는 위대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부모는 그런 자녀가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명품을 부러워하는 인생이 되지 말고 내 삶이 명품이 되게 하라. ―원 베네딕트 일으킨 '소란'이 못마땅하다. 길을 지날 때마다 죽은 동생을 떠올리게 된 그녀의 아들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다.
며칠 뒤 마을의 신부가 그녀를 찾아온다.
"당신이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아요. 우리 모두, 온 마을이 압니다. 당신이 필요한 게 있다면 우린 뭐든 할 겁니다. 항상. (중략) 그러나 당신의 광고판에 대해서만큼은 온 마을이 단호합니다."
그녀는 안다. 저 사려 깊지 못한 말이 거짓이라는 걸. 그녀가 겪은 지난 7개월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녀는 벌써 교회에 나가지 않은 지 오래다.
"내 부엌에서 꺼져요."
그녀가 내쫓지 않았다면 신부는 이렇게 덧붙였을지 모른다. '광고판이 동네의 평판을 망치고 있다'고. 한국에선 보통 이렇게들 말한다. '너 때문에 이번 사업을 망쳤다'거나 '바라던 걸 안 들어준다고 분풀이하는 거냐'고. 다들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난 그 광고판이 공정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윌러비 서장은 억울하다. 게다가 그는 암에 걸려 곧 죽을 처지다. 그러나 그녀는 뜻을 굽힐 생각이 없다. 피해자들을 대하는 경찰과 이 사회의 태도가 공정하지 않다 믿기 때문이다.
영화는 묻는다. '우리는 과연 공정함을 따져 물을 수 있는가'.
영화가 던지는 두 번째 질문, '정의로운가'
▲ 딕슨과 밀드레드 |
ⓒ 쓰리 빌보드 |
윌러비 서장을 따르는 경찰 딕슨(샘 록웰 분)은 자신만의 정의에 갇혀있다. 그래서 그는 흑인들에겐 폭력도 서슴지 않는다.
윌러비 서장이 죽자, 그는 광고판을 빌려준 중개업자를 두들겨 팬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일로 보이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가 않다. 지금 우리 사회엔 딕슨들이 차고 넘친다.
어렵게 용기를 낸 피해자들에게 우루루 몰려가 본때를 보여주려는 이들이 그렇다. 그들도 딕슨 못지않다. 얼굴도 이름도 감춘 채로 몰려다니면서 '꽃뱀'이라 낙인찍고 '음모론'을 퍼뜨린다. 얼굴을 드러내라 윽박지르기 일쑤지만 정작 책임지는 법은 없다.
영화가 끝날 무렵 딕슨은 몰라지게 달라져있다. 하지만 자신이 믿는 정의를 향해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드는 것만큼은 그대로다. 딕슨의 정의는 여전히 누군가에겐 폭력일 뿐이다.
여기서 영화는 다시 묻는다. '우리가 좇는 정의는 다른 이에게도 정의로운가'.
영화가 던지는 마지막 질문, '올바른가'
▲ 윌러비와 밀드레드 |
ⓒ 쓰리 빌보드 |
윌러비 서장은 죽음을 앞두고 밀드레드에게 편지를 남긴다. 그는 먼저 범인을 잡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범인을 잡지 못해 자신도 괴로웠다며, 억울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광고를 내건 건 아주 좋은 생각이었다고 인정했고, 범인이 꼭 잡히길 바란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윌러비 서장은 아무도 모르게 한 달치 광고비를 내주기도 했다. 그는 억울했고, 죽음을 앞두고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피해자의 입장에 서려 애썼다. 좋은 경찰이 돼주진 못했지만 적어도 좋은 이웃이자 좋은 시민으로 남은 것이다.
영화는 마지막으로 묻는다. '한 사람의 동료이자 시민으로서 우리의 태도는 올바른가'.
8년 만에 입을 연 어느 검사의 외침을 시작으로 우리 사회 곳곳엔 크고 작은 '쓰리 빌보드'들이 세워지고 있다. 아마 이 '소란'은 앞으로도 한참은 더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 누군가의 마지막 외침이 터져 나올 때까지 이 '소란'이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 사회가, 우리들 모두에게 더 나은 곳이 될 수만 있다면 이깟 '소란'쯤 아무 것도 아니다.
정말 두려운 건 그 숱한 외침에도 우리들 삶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게 아닐까. 오늘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게 있다면 그것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달라지지 않으면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 나면 아마도 당신 곁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세워져 있을 '쓰리 빌보드'가 조금은 달리 보일 것이다. 그러니 너무 늦지 않게 이 영화를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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